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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개요   :  액션

   개봉일   :  2023-01-23

   감독   :  이해영

   출연   :  설경구,이하늬

   등급   :  15세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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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영의 첩보영화 [유령]의 원작소설은 마이지아의 [풍성]입니다. 2009년에 만들어진 영화판은 [바람의 소리]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소개되었고 팬을 꽤 많이 갖고 있어요. 많이들 저우쉰과 리빙빙이 썸타는 영화로 소비하고 있습니다. 2020년에 텔레비전 드라마로도 각색된 것으로 아는데, 이 설정으로 38회분을 어떻게 채웠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이해영의 영화는 1940년대 중국 무대를 1930년대 ([상하이 익스프레스]와 [드라큘라]의 개봉으로 연도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한국으로 옮겼습니다. 그래도 기본 설정은 같아요.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는 레지스탕스 조직이 유령이라는 첩자를 보냈고, 일본측에서는 이 첩자를 잡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가짜 메시지로 추려낸 용의자들은 외딴 해변의 호텔에 감금되었고 유령이 밝혀지기 전에는 어느 누구도 나가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첩보물이면서 범인을 잡는 추리물이기도 합니다. 탐정이 악역인 일본군 장교이고 범인이 '우리편'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긴장감과 장르적 뒤틀림이 있습니다.


원작소설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한 비교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유령]이 [바람의 소리]보다 자유로운 각색인 게 분명합니다. 영화 중반에 가면 이 영화는 심지어 장르도 바뀝니다. [바람의 소리]는 임무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평범한 전문가들이 나오는 사실적인 첩보물입니다. 하지만 [유령]은 [바람의 소리]와 어느 정도 이야기가 겹쳐지던 중반을 넘어서면 갑자기 (박소담 캐릭터의 특정 행동이 신호입니다) 존 카펜터와 세르지오 레오네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총성이 난무하고 피가 튀기며 시체들이 쌓입니다. 전 박찬욱의 [아가씨] 생각도 좀 했습니다. 원작을 단순하고 호탕하게 변형시킨 팬픽인 거죠.


이러한 변형에는 장단점이 있습니다.


일단 전 [바람의 소리]보다 재미있게 봤습니다. [바람의 소리]는 기술적으로 아주 잘 만든 영화는 아니고 대사 위주의 추리소설을 각색하는 영화 특유의 단조로움이 느껴집니다. 무엇보다 리빙빙과 저우쉰 캐릭터 그리고 탐정역의 일본군 장교를 제외하면 남은 용의자들이 별 재미가 없고 진상 역시 좀 심심한 편이지요. 영화는 아직 추리물인 도입부에서부터 이하늬가 연기하는 주인공 박차경의 내면을 한 7,80퍼센트 정도 드러내면서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게 하며 서스펜스를 유발합니다. 배우들을 구별할 수 있는 한국 관객들에게만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이하늬와 박소담이 연기하는 두 여성 캐릭터를 제외한 다른 남자들도 비교적 분명한 개성이 보이고요. 무엇보다 끝없는 액션으로 이어지는 후반부가 지루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그리고 몇몇 액션 설계는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우아한 여전사 액션 대신 몸을 던지는 개싸움을 하는 이하늬만 봐도 그런데.


하지만 [풍성]의 설정이 처음부터 비장하고 우아한 첩보 추리물을 위해 설계되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원작을 떠나는 중반 이후는 아무래도 어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원작을 떠나면서도 자연스러움과 새로운 깊이를 챙기는 각색도 있지만 이해영이 그런 것에 신경을 썼다는 생각은 안 듭니다. 개인적으로 전 액션물로 넘어가더라도 호텔은 될 수 있는 한 벗어나지 않는 게 좋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해영은 주인공이 '임무 취소'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죠. 전 영화가 여성 암호해독가라는 캐릭터 설정의 매력을 너무 쉽게 버려서 아쉽다고도 생각했습니다.


영화에서 가장 재미있게 변형된 부분은 멜로드라마입니다. 앞에서 [바람의 소리]가 리빙빙과 저우쉰이 썸타는 영화처럼 소비된다고 했습니다. 이해영은 [바람의 소리]의 서브텍스트를 대놓고 앞으로 끌어냅니다. 이 영화에서 박차경은 거의 확실하게 여자친구가 있었던 동성애자이고 (이해영은 [바람의 소리]에는 있던 남자친구도 꼼꼼하게 지웠습니다.) 독립운동을 시작한 이유도 바로 사랑 때문입니다. 두 주인공이 처음부터 당연한 듯 성적 긴장감을 주고 받았던 원작에서와는 달리 박차경과 박소담이 연기하는 유리코는 거의 백지에서부터 조금씩 관계를 쌓아갑니다. [바람의 소리]에서 벗어난 또다른 멜로드라마는 설경구가 연기하는 무라야마 쥰지의 과거사에도 있습니다. 이 캐릭터의 행보는 [바람의 소리]에는 없고 오로지 일제강점기의 조선에서만 가능한 주제와 이야기를 만들어냅니다.


영화는 탐미적으로 재해석된 1930년대의 조선을 보여줍니다. [바람의 소리]에 많이 기대고 있는 호텔보다는 경성 묘사에서 그런 점이 더 두드러지죠. 여기엔 고전 영화의 아우라도 들어가 있습니다. 특히 [상하이 익스프레스]와 마를레네 디트리히요. 이 영화가 여성 캐릭터를 묘사하는 방식은 종종 클래식 할리우드 시대 스타들의 광채를 재현하는 시도처럼 보입니다.


[바람의 소리]를 먼저 보고 봐야 하느냐. 글쎄요. 안 보고 그냥 독립적인 영화로 즐길 수도 있지만 전 보는 게 더 좋을 거 같습니다. 일단 [바람의 소리]를 보더라도 반복처럼 느껴지지 않고, 첫 번째 영화와는 다른 길을 가는 캐릭터들을 보는 재미도 있습니다. 그 때문에 더 재미있을 수도 있고 실망스러울 수도 있는데, 실망하더라도 첫 번째 영화가 남으니까요. 전 이하니, 박소담의 캐릭터 묘사가 좋았지만 여전히 이전에 리빙빙과 저우쉰이 썸타는 영화가 있다는 게 좋거든요.


출처 - 듀나의 영화낙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