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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개요   :  드라마, 스릴러

   개봉일   :  2016-06-01

   감독   :  박찬욱

   출연   :  김민희, 김태리, 하정우, 조진웅, 김해숙, 문소리

   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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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라 워터스의 [핑거스미스]는 이미 2005년에 bbc에서 3부작 미니 시리즈로 각색된 적이 있지요. 완벽하게 마음에 드는 각색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원작에서 가져온 좋은 부분들이 많이 빛난 작품이었습니다. 전 그 드라마 이후 일레인 캐시디와 샐리 호킨스의 팬이 되었고 골무를 음란한 눈으로 보게 되었지요.

원래 박찬욱은 [핑거스미스]의 시대배경을 옮길 생각이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미 미니시리즈가 만들어진 걸 알고 포기했다가 무대를 30년대 일제강점기의 조선과 일본으로 옮길 아이디어를 냈다고 해요. 다행이지요. 박찬욱이 빅토리아 조 영국을 제대로 다룰 수 있었을 거란 생각이 안 들어요. 이런 식의 문화적 가지치기의 매력도 있고요.

이렇게 해서 나온 [아가씨]는 원작과 많이 다른 물건입니다. 1부까지는 꽤 그럴싸하게 닮았어요. 사기꾼 백작이 도둑의 딸인 숙희를 대저택에 사는 아가씨의 히데코의 하녀로 보내고, 숙희는 백작의 희생양인 아가씨와 사랑에 빠지고. 원작의 3부작 구조를 해체했던 미니 시리즈보다 더 충실해 보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2부부터 조금씩 다른 길을 가다가 3부에서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이야기를 짜맞추는 방식도 달라요. 영화는 원작보다 퍼즐 같죠. 1부에서 일부러 눈에 뜨이는 빈 부분을 보여주고 2부에서 그 부분을 채우는 식입니다.

결과물은 원작보다 훨씬 가볍습니다. 온갖 음모와 반전이 난무하는 소설이지만 [핑거스미스]의 주인공들은 그 안에서도 늘 진지한 사람들이지요. 죄책감, 사랑, 고통, 증오, 분노의 무게가 모두 엄청나고 그 감정의 롤러코스터가 소설이 끝날 때까지 갑니다. 하지만 [아가씨]에선 모든 게 가벼워졌어요. 새로 추가한 반전 때문에 앞에 그려진 감정묘사가 가벼워지기도 하고 일단 두 캐릭터가 발전하고 성장하는 3부의 이야기 대부분이 날아갔으니까요. 멜로드라마보다는 케이퍼물에 가까워요. 유머도 늘어났고.

줄거리와 캐릭터를 보면 더 귀여운 버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숙희와 히데코는 원작의 수와 모드보다 훨씬 정을 주기 쉬운 사람들이죠. 한마디로 팬픽 주인공입니다. 맘에 드는 길을 걷지 않는 캐릭터들이 갑갑해서 독자들이 직접 쓴 대안물 같달까. 원작을 읽은 팬들에게 지나치게 가볍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굳이 그 귀여움과 거기에서 파생된 매력을 부인할 생각은 안 들죠. 생각해보니 팬픽으로 이야기를 넓힌다면 할 말이 많아집니다. [아가씨]는 팬픽이기도 하지만 팬픽과 팬픽독자들에 대한 영화이기도 해요.

반대방향, 그러니까 일제강점기 배경의 멜로드라마로 보았을 때도 이 가벼운 매력은 흥미롭습니다. 영화는 이를 위해 동성애라는 금기를 무심한 듯 당연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숙희와 히데코 둘 중 한 명이 남자였다고 생각해보죠. 그렇다면 그 이야기는 젠더와 민족주의에 얽힌 고정관념 때문에 불쾌해졌을 것입니다. 남자 둘이었어도 이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을 거예요. 하지만 여자 둘인 경우는 사정이 다르죠. 한국 관객들에겐 아주 드문 경험인 것입니다. 한국영화를 보면서 일제강점기 일본인 캐릭터에 이렇게 편안하게 감정이입하는 경우는 많지 않잖아요.

신경 쓰이는 건 남자들의 존재입니다. 이 영화에서는 원작보다 남자들의 비중이 더 커요. 원작의 석스비 부인에 해당되는 캐릭터가 거의 없어져 버렸고 원작의 크리스토퍼 릴리인 후견인 코우츠키의 비중이 높아졌죠. 이런 변형이 영화에 새로운 주제를 추가하긴 합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친일파'라는 사람들이 어떤 인물들이었는지에 대한 흥미로운 해석을 주죠. 이들이 영화 내내 대부분 조롱의 대상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이들에게 클라이맥스를 내준 건 좀 심했습니다. 한국 영화가 종종 빠지는 함정인데, 자기 비하와 조롱이 심해지면 그게 어느 순간부터 나르시시즘이 된단 말이죠. 여자들이 주인공인 이야기에선 여자들에게 클라이맥스를 주어야죠. 징징거리는 남자들이 차지할 자리가 아니란 말입니다.

소문도 무성했던 섹스신들을 그렇게 좋아할 수는 없었습니다. 일단 1,2부의 섹스신은 스토리 전개와 어울리지 않죠. 두 주인공의 상황을 고려해보면 그들이 그렇게 고난이도의 체위를 서커스처럼 실연하는 건 어색하기 짝이 없습니다. 3부의 섹스신은 주제와 의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원작의 주제와도 그렇게까지 어긋나 있다고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맘에 안 들었고요. 그 흐름에선 주제가 뭐건 뭔가 다른 걸 보고 싶었어요. 이들에 대한 제 거부감이 감독의 'male gaze'와 연결된 것일까? 글쎄요. 따지고 보면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섹스신도 이 공격에서 자유로울 수 없겠지만 여기에 대해 불평하는 사람들은 없지 않습니까. 오히려 주제에 대한 기계적인 접근법이 흐름과 캐릭터를 무시한 결과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 영화의 섹스신은 좀 데칼코마니 같아요. 내용보다는 대칭성이 더 중요시되는.

배우들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영화를 살린 건 대부분 여자들입니다. 김민희의 나른한 우아함과 김태리의 귀여운 야생동물과 같은 이미지가 캐릭터에 착 달라붙었고 같이 붙여놓으면 호흡도 참 좋습니다. 짧게 나오지만 문소리의 카메오도 인상적이고요. 하정우와 조진웅의 경우는 그럭저럭 기본만큼 활용된 편인데, 문제는 캐릭터가 납작하고 기능적인 캐리커처인데도 눈치없이 너무 많이 나온다는 것이죠. 





컨텐츠 제공 : 듀나의 영화낙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