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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에게

   개요   :  멜로/로맨스

   개봉일   :  2019-11-14

   감독   :  임대형

   출연   :  김희애, 김소혜, 성유빈

   등급   :  12세 관람가



임대형은 첫 장편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를 찍고나서 좋은 여성 캐릭터들을 만들었다는 호평을 받았습니다. 그 영화에 나오는 여자들은 자기 주장과 의지가 굳은 개성적인 인물들로, 얄팍한 스테레오타이프와는 거리가 멀었으며 캐스팅도 좋았습니다. 하지만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는 제목부터 남자들의 이야기였고, 여기서 조연들이 행동하고 발전할 수 있는 폭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저 정도 비중의 캐릭터들이 칭찬을 받았던 것 자체가 한국 영화의 여성 캐릭터의 양이 얼마나 빈약한가를 보여주는 사례였을 거예요. 다들 욕심과 기대가 너무 없었던 거죠.

근데 제가 임대형이었다면 이 상황을 도전처럼 받아들였을 거 같습니다. 잘 만든다고 칭찬을 받은 여성 캐릭터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장편영화를 만들어 보면 어떨까. 단편에서 경험이 없었던 것도 아니잖아요. 임대형의 창작 과정이 정말로 어땠는지 제가 알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윤희에게]가 나온 것도 그 피드백의 결과가 아닐까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영화의 이야기는 고전적이기 짝이 없습니다. 이혼하고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딸 새봄과 함께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윤희에게 쥰이라는 사람이 보낸 편지가 도착합니다. 사실 쥰은 편지를 써놓기만 하고 보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같이 사는 마사코 고모가 대신 부친 것이죠. 그리고 그 편지를 윤희보다 새봄이 먼저 읽었습니다. 새봄은 엄마에게 해외여행을 제안하고 두 사람은 쥰이 사는 홋카이도 오타루에 갑니다. 한국 관광객들에게는 이와이 슌지의 [러브 레터] 촬영지로 알려진 곳이죠. 두 영화 사이엔 분명 유사점이 있는데, 임대형은 각본을 쓰면서 스테판 츠바이크의 [낯선 여인에게서 온 편지]도 참고했다고 합니다. 그러고보니 영화의 정서는 츠바이크의 소설이나 그 소설을 각색한 막스 오퓔스 영화에 조금 더 가깝긴 해요. 적어도 영화의 시작과 끝을 책임지는 편지들의 정서는요.

이야기의 기반이 되는 것은 윤희와 쥰의 사랑이지만 영화가 집중하는 것은 연애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억지로 헤어진 뒤, 윤희는 일찍 결혼했고 아이를 낳았습니다. 쥰은 자신을 감춘 채 독신으로 살고 있습니다. 여기서 자신을 감춘다는 것은 어머니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감추었다는 말도 되는데, 종종 이는 중첩됩니다. 영화는 클로짓 동성애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당사자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아주 꼼꼼하게 보여줍니다. 윤희와 쥰은 그냥 첫사랑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이 아니에요. 20년에 걸친 세월 동안 쌓여가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아픈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고통은 부당하지요.

뜻밖에도 임대형은 이 고통스러운 상황을 가족 안에서 풉니다. 설정만 들으면 지나치게 낙천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지는 않습니다. 윤희와 쥰의 고통이 시작된 지점도 가족이니까요.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영화는 한 사람에게 가족이 끼칠 수 있는 해악과 해답 모두를 다양한 관점에서 보여줍니다. 윤희와 새봄, 쥰과 마사코가 이루는 가족은 그들이 이전에 속해 있던 자칭 '정상가족'과 그들이 주었던 폭압적인 애정에 대한, 완벽하지는 않지만 긍정적인 대안입니다.

이 영화를 본 몇몇 관객들은 잘 쓴 단편소설을 읽는 것 같았다고 말을 하던데, 그건 영화가 특별히 '문학적'이어서가 아니라 형식적으로 꽉 짜여진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영화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 그러니까 적절하게 캐스팅된 배우들, 쥰이 키우는 고양이, 마사코가 읽는 SF소설들, 구름 사이로 보이는 달에서부터 클럽에서 흘러나오는 [문라이트 세레나데]에 이르는 모든 것들이 다 제자리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게 생기없는 구조미로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반대로 영화 끝까지 조금씩 고양되어 가다가 마지막 문장으로 최고도에 오르는 감정을 살리고 있지요. 개인적으로 임대형이 잠재적 관객들에 대해 꼼꼼하게 조사했다는 의심도 조금은 품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등장하는 담배들, 모녀를 연결하고 드라마 안에서 다양한 역할을 하는 카메라와 같은 것들이 그냥 등장했을까요. 아, 고양이들도요. 고양이 이름 쿠지라는 감독의 고양이 고래에서 따왔다고 하지만요.

[윤희에게]는 담담하지만 격정적이고, 한없이 수줍지만 그만큼 로맨틱한 영화입니다. 많은 고전적인 퀴어 서사가 그렇듯 감정을 억누르는 행위 자체를 스타일로 삼고 있지요. 그 때문에 조금 갑갑하기도 해요. 하지만 그 엄격한 포장 속에서 정확한 타이밍에 터져 나오는 고백의 힘이 그 때문에 더 강해지기도 하는 걸요.


출처 : 듀나의 영화낙서판